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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권/경남

우리나라의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와 무봉사(2023.3.10일)

by 요다애비 2023. 3. 11.

밀양 영남루와 무봉사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영남루와 무봉사에서 보는 밀양의 경치가 멋있습니다.
 

 
 
<영남루 >
 
밀양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뛰어난 조각미가 조화를 이뤄 우리나라 전통 누각의 진수를 보여준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 사이를 넓게 잡고 굵은 기둥으로 누마루를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영남제일루라는 이름에 걸맞다.
좌우 부속 건물로 능파각과 침류각을 날개처럼 거느리고 있다. 영남루라는 이름은 고려 말인 1365년  지밀성군사 김주가 영남사가 있던 절터에 새 누각을 지으면서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객사 부속 건물로 쓰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 밀양 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었다. 유명한 문인들의 시와 글을 새긴 현판이 한때 300개나 걸려 시문 현판 전시장으로 불렸다. 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천진궁은 1665년 객사 부속 건물로 건립되었으나 곧 객사로 활용됐다. 영남루 앞과 천진궁 입구 땅바닥에는 마치 장미나 국화 꽃송이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듯한 돌꽃이 깔려 있다.
 
 

 


▼ 능파각과 영남류
 

 


▼ 능파각
 

 


▼ 영남루
 

 


▼ 침류각
 

 


<천징궁>
 
천진궁은 원래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밀양부사 홍성구(洪聖龜)가 창건한 요선관(邀仙館)으로 본래 전패를 봉안한 공진관의 부속 건물로서 건립되었으나 경종 2년(1722년) 경부터 공진관을 대신하여 전패를 보관했던 객사로 활용되었으며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부사 신중이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부사 이인재가 크게 보수를 하였는데 이때 일주 삼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위패를 땅에 묻고 헌병대 감옥으로 사용했던 아픈 역사가 있었지만 해방 후 1952년부터 단군 봉안회가 발족되어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이름을 짓고 해마다 음력 3월 15일을 어천대제로, 10월 3일을 개천대제로 하여 춘추로 향사를 올려오다가 1957년에 본전과 일주 삼문을 다시 수리하면서 종전 대덕전을 천진궁으로, 정문을 만덕문이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진궁(天眞宮)은 단군 아래 역대 8 왕조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중앙 수좌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동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 고려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 시조의 위패를 차례로 봉안하고 있다고 하며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천진궁에 들어가는 정문은 만덕문(萬德門)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표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중 ‘삼일신고’ 천훈에 “계만선 문만덕”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한 천진궁은 나라의 길흉사를 예진하는 사명대사비석(땀나는 비석)과 밀양의 정신을 대변하는 아랑의 전설이 담긴 밀양아리랑과 함께 밀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 만덕문과 천진궁
 

 


▼ 만덕문 앞 비각
 

 


▼ 만덕문
 

 


▼ 천진궁
 

 


<무봉사>
강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밀양강과의 조화로 그림 같은 풍경을 지닌 운치 있는 사찰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493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하다. 밀양의 지세가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봉사로 이름하였다 전한다. 또한 무봉사에는 무봉사 태극나비가 있다. 어느 날 춘삼월도 아닌 음력 2월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아동산)을 뒤덮으며 며칠 동안 날아다니더니 갑자기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다녔던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고,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어지럽던 사회가 마침내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아동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조 5백 년과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 3시쯤 태극나비를 한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박시춘 선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