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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권/경북

경주 서악동 고분군, 서악서원, 서악동 삼층석탑(2021.6.2일)

by 요다애비 2021. 6. 6.

 

 

<서악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 경주부윤 이정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비롯하였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여, 이정이 퇴계 이황과 의논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에 탔으나 이후 다시 세워졌다. 인조 원년(1623년)에 서악서원으로 사액되었고,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가 현판의 글씨를 썼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문루인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 후묘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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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당 뒤의 표식 없는 고분군들...>

 

 

 

 

 

 

<서악동 삼층석탑> 보물 제65호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은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바닥돌은 낮게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8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 올렸다. 1층은 남쪽면에 네모꼴로 파서 문을 표시하였고, 그 좌우에 금강역사상을 새겼다. 문 모양 부분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구멍이 2개씩 남아 있다. 지붕돌은 별돌탑처럼 아래 위쪽이 모두 계단식이고 처마가 평행한 직선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큰 직사각형 돌을 쌓아 바닥돌을 구성한 것은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이나 남산 용장계 지곡 제3 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935호)과 같은 방식인데, 서악동 삼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놓인 몸돌받침이 1단으로 줄어들고 크기도 작아졌다. 이러한 모양은 경주 지역의 탑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이다.

 

 

 

 

<서악지구 고분군> 경주 헌안왕릉, 문성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

 

 

 

 

<도봉서당>

    도봉서당은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이 서당은 숭앙문·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상허당 등 모두 7도이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치형식은 재사를 강당 뒤에 둔 전강당 후재사형인데,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 사당(상허당)은 정면 4칸·옆면 1.5칸이며, 중당협실로 구성된 바로 볼 때 강당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연어재)는 남쪽과 동쪽면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두 개의 정면을 갖게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서악동 고분군>

 

사적 제142호. 면적 1,930제곱미터. 무열왕릉의 뒤쪽 경사면에 상하 일렬로 정렬한 4기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봉토의 크기는 저경(底徑) 40m 정도, 높이 25m 정도이다. 이들 고분은 경주시 남부의 평지묘(平地墓)와는 달리 산의 경사면에 있어, 충효리(忠孝里) 고분과 마찬가지로 통일기의 남향석실묘(南向石室墓)로 추정된다. 무열왕릉과의 입지관계로 보아 왕이나 왕족의 분묘로 생각된다. 서악리고분은 민족항일기에 1기가 조사되어 서악리석침총(西岳里石枕塚)의 이름으로 보고되었지만, 간단한 도면과 사진만「조선고적도보」제3권에 게재되었을 뿐 그 뒤 1964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돌방무덤 1기가 더 조사, 이때 발굴된 서악리돌방무덤은 동서 2.65m, 남북 2.7m의 방형에 가까운 돌방의 중앙에 너비 1.5m, 높이 1.25m, 길이 1.6m 크기의 널길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