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코리아둘레길/서해랑길

서해랑길64-2코스(지선2) [서산] 부석버스정류장~ 해미읍성 (2024.4.10일)

by 요다애비 2024. 4. 11.

요 며칠 사이에 완연한 봄이 왔습니다. 서해랑길 64-2코스(지선 2코스)는 봄꽃과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출발점인 취평리 부석사길에서 보았던 도화·만첩홍·만첩백도, 부석사 입구에 지천으로 핀 자주광대나물·벚꽃·동백 등, 도비산을 수놓고 있는 제비꽃·개별꽃과 아직 피지 않은 산자고 등, 도당천을 따라 피어있는 민들레와 봄까치꽃 등 다양한 야생화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해랑길 64-2코스는 부석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하여 부석사와 도비산 둘레길을 지나서 도당천을 따라 해미읍의 해미읍성까지 약 22.7Km를 걷는 구간입니다.
서해랑길 64-2코스의 특징을 꼽자면, 초반에 걸었던 부석사와 도비산 둘레길은 꽃과 풍경을 즐기기 좋았고, 중반에 걸었던 도당천변은 조금 다조로웠으며, 종반에 걸었던 해미천, 해미국제성지, 해미읍성은 투표일 쉬는 날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았고 불거리도 많았습니다.

 
 
☞ 코스개요, 관광포인트, 여행자 정보는 두루누비 홈피에서 퍼옴
 
<주요 지점>
부석버스정류장 ~ 8.8Km  ~ 모월저수지 ~ 12.6Km ~ 해미순교성지 ~ 1.3Km ~ 해미읍성 : 길이 22.7km
 
<코스 개요>
- 호젓한 산사에서 마음의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코스
- 조선시대 지방읍성의 모습과 수많은 희생을 치른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코스
 
<관광포인트>
-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 '부석사'
- 천주교 박해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 기념관과 성당이 있는 '해미순교성지'
- 조선 읍성의 형태와 당시의 관사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해미읍성'
 
<여행자 정보>
- 시점: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부석버스정류장
교통편) 서산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610, 660번 버스 이용, 부석정류장에서 하차
- 종점: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
- 해미읍성 운영시간 06:00 ~ 19:00(3월~10월은 21시까지 운영)
 
 
 
<서해랑길 64-2코스(지선 2코스) 기록>
 

 
 
 
▼ 차부삼거리 부석버스정류장 뒤 서해랑길 안내판에서 64-2코스 걷기 시작
 

 
 
▼ 부석사길을 따라서...
 

 
 
▼ 정원에 핀 꽃들을 감상하며 지나갑니다...
    ↓ 만첩홍도

 
 
    ↓ 개나리
 

 
 
    ↓ 복사꽃
 

 
 
    ↓ 백도화, 수선화 등
 

 
 
    ↓ 복사꽃
 

 
 
▼ 취평2리회관
 

 
 
▼ 도비산 쪽으로...
 

 
 
▼ 도곡지
 

 
 
▼ 동사 갈림길에서 부석사 쪽으로...
 

 
 
▼ 소나무도 감상하고...
 

 
 
▼ 수도사 입구
 

 
 
▼ 부석사 초입의 벚꽃
 

 
 
▼ 도비산 등산 안내판과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 기념비
 

 
 
▼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 기념비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일 제4대 세종대왕)을 대동하고 1416년 2월 16일에 7,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이곳 도비산을 직접 방문하여 사냥몰이를 하였던 곳이다.
이 사냥몰이는 단순한 사냥몰이가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의 일종으로 강무(講武)라고 부른다.
서산지역에서 이곳 도박산을 택한 이유로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부석면 창리(왜현리) 지방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도비산에 올라 이를 살피기 위한 일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 해미성의 축조를 구상하여 다음 해인 1417년부터 1421년까지 해미읍성을 축조하게 되고,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기는 등 충청서해안 방어를 위한 큰 역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우리 고장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방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지역으로 대왕께서 친히 궁중을 떠나 장기간 지방에 머물며 지방을 살살이 돌아본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 태종대왕 (1367~1422): 조선 제3대 왕(1400~1418)이며 이름은 방원, 자는 유덕, 태조의 다섯째 아들임.
▶ 세종대왕(1397-1450): 조선 제4대 왕(1418~1450)이며 이름은 도, 자는 원정(치과) 태종의 셋 아들임.
 

 
 
▼ 도비산 부석사 일주문
 

 
 
▼ 일주문에서 본 풍경
 

 
 
▼ 부석사 운거루와 다원
 

 
 
▼ 금강문
 

 
▼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 577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다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고승 만공이 머무르면서 선공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부석사의 경내에는 극락전, 안양루, 관음전, 산신각 등이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숙종 15년 1689에 숙종의 왕자의 증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으나 1905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산신각에는 산신과 함께 선묘남자와 용왕을 모셨으며, 산신각에서 산 위로 좀 더 올라가면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부석사는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면서 기거하면 집에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고 한다. 선묘는 의상을 연모하여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의상은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던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죽어서 용이 되었다. 죽어서 용이 된 선묘는 귀국하는 의상의 바닷길을 수호하였다고 한다. 선묘의 도움으로 무사히 서해안에 도착한 의상은 가장 먼저 선묘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도비산에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의 멸망 후 민심이 흉흉하면 지역이라 일부 백성들은 반대를 하였다. 이에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바위를 하늘에 띄워 반대하는 무리들을 물리쳤고,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묘가 하늘로 들어 올렸던 부석은 현재 부석사 앞 10km 지점의 바다에 섬(지금의 검은여)이 되었다. 이후 절의 이름을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의 부석사라고 하였다. 영주 부석사에도 이와 유사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말의 한 충신이 조선 개국 후 나라를 잃은 설움을 품은 채 이곳에 별당을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별당은 사찰로 변했는데, 도비산 자락 바위 절벽에 자리한 사찰이 마치 바다 가운데 바위섬처럼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부석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극락전으로 오르며...
 

 
 
▼ 자주광대나물이 자천입니다....
 

 
 
▼ 종무소와 심검당
 

 
 
▼ 극락전
 

 
 
▼  못 이룬 사랑 용이 되어

신라 제28대 임금 진덕여왕 4년 서기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대사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대사는 큰 뜻을 품고 당나라에 들어가 지장사에서 지엄법사라는 노(老)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불도)를 하였다.
나이 많아 시작한 공부지만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지 의상대사는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이때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 낭자"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신라에서 온 의상대사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문무왕 1년에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낭자는 떠나기 전날, 의상대사를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였고 이에 의상대사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불가함을 설명하자 물러갔다.
다음날, 의상대사가 배를 타려고 하자 그 낭자가 어느새 승복차림에 "결혼은 못하더라도 스님 곁에서 나도 불도를 배우겠다고 말하자 의상대사는 다시 점잖게 꾸짖으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의상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을 것을 안 낭자는 죽을 것을 결심하고 깊은 바다로 풍덩! 뛰어들고 말았다.
의상대사는 자기 때문에 죽은 낭자를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죽은 낭자가 용이 되어 의상대사가 탄 배를 따라 신라까지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의상대사가 가는 곳마다 숨어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의상대사는 자기 때문에 죽은 여인을 생각하고 그 여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절 터를 찾았다. "당나라의 그 낭자를 위해 아담한 절을 창건하여 그의 넋을 위로하리라" 의상대사는 이곳저곳 절터를 물색하다가 서산군 부석면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산수가 수려하고 앞에 바다가 탁 트였으니 그 낭자가 좋아할 것 같아!" 의상대사는 좋은 곳에 절을 짓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그때가 문무왕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그곳 동네 사람들은 도비산에다 절을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의상대사는 절 짓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사람들은 거의 다 지어가는 절을 쇠스랑을 들고 쫓아와서 부수어 버리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흥분하여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할 때 갑자기 큰 바위가 공중에서 둥둥 떠오더니 바위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듣거라,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계속 방해하면 이 바윗돌로 너희들 머리를 부수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산이 흔들리도록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혼비백산 쫓겨가면서도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도리가 없었다. 의상대사는 생각하기를 저 바위는 당나라 낭자가 용으로 변하여 그 용이 다시 바위로 변하여 나를 도와주는 거야!" 의상대사는 새삼, 죽은 낭자가 가엾다고 생각이 들었다. 바위는 훌쩍 날아가 절에서 바로 보이는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절 짓는 공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물 위에 떠 있다 해서 "부석"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절 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금종각
 

 
 
▼ 산신각
 

 
 
▼ 마애불
 

 
 
▼ 증진선원
 

 
 
▼ 부석사를 바라보고...
 

 
 
▼ 도비산 둘레길로...
 

 
 
▼ 도비산 정상은 오르지 않고 동사 쪽으로...
 

 
 
▼ 동사(암)
 

 
 
▼ 묘봉선사(1942~2022)를 기리며...
 

 
 
▼ 다시 둘레길을 따라서...
 

 
 
▼ 평림원(평택 임씨의 묘원인 듯)
 

 
 
▼ 전망대에서
 

 
 
▼ 서산 간월지구 간척지를 바라보고...
 

 
 
▼ 산길에서 내려와 임도를 따라서...
 

 
 
▼ 멀리 서산시가 보이고요...
 

 
 
▼ 모월저수지도 보입니다...
 

 
 
▼ 산동리 쪽으로 하산
 

 

 
 
▼산동 1리 버스정류장
 

 
 
▼ 어느 집 앞뜰의 나무도 구경하고...
 

 
 
▼ 산저사거리
 

 
 
▼ 모월저수지 쪽으로...
 

 
 
▼ 아이디어가 참신하네요... 자꾸자꾸 생강나...
 

 
 
▼ 산동리버스정류장
 

 
 
▼ 낮은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도 바라보고...
 

 
 
▼ 민들레
 

 
 
▼ 작은 수로를 따라서...
 

 
 
▼ 도비산을 바라보며...
 

 
 
▼ 모월저수지
 

 
 
▼ 야당천
 

 
 
▼ 야당천을 따라서...
 

 
 
▼ 도비산을 바라보고...
 

 
 
▼ 다리를 건너서...
 

 
 
▼이곳부터는 도당천을 따라서...
 

 
 
▼ 도당천
    도당천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에서 발원하여 운산면, 해미면을 지나 간월호로 흘러가는 금강 서해권 수계에 속하는 지방하천
 

 
 
▼  와당교 쪽으로...
 

 
 
▼ 들판 건너 가야산을 바라보고...
 

 
 
▼ 배수갑문
 

 
 
▼ 경고문도 여럿 지나고...
 

 
 
▼ 둔당천 합류지점
 

 
 
▼ 군부대 초소와 그 뒤 가야산
 

 
 
▼ 서산시 쪽...
 

 
 
▼ 서산체력단련장으로...
 

 
 
▼ 군부대 철책 외곽을 지나서...
 

 
 
▼ 해미읍 쪽으로...
 

 
 
▼ 도비산을 뒤돌아보고...
 

 
 
▼ 해미국제성지 쪽으로...
 

 
 
▼ 이제는 해미천을 따라서...
 

 
 
▼ 해미천도 건너고...
 

 
 
▼ 다시 반대쪽으로 건너서...
 

 
 
▼ 미나리를 캐고 있답니다...
 

 
 
▼ 해미천변의 벚꽃은 지금 한창입니다...
 

 
 
▼ 해미국제성지 후문
 

 
 
▼ 해미국제성지를 둘러보고...
 

 
 
▼조산 2교를 건너서...
 

 
 
▼ 해미천변의 벚꽃들...
 

 
 
▼ 해미읍성 쪽으로...
 

 
 
▼ 해미읍성 진남문
 

 
 
▼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 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 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로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1652년(효종 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 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들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해자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멍이.
** 여장 :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 겸영장 : 지방 수령이 각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일을 겸하여 맡아보던 무관 벼슬

 
 
▼  해미읍성을 둘러보고...
 

 

 
 
▼ 해미읍성을 나와 성곽밖 서해랑길 안내판에서 64-2코스(지선 2코스) 걷기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