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7코스를 걸으며 들렀던 황희정승의 반구정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의 사진을 별도로 게시합니다.
<황희 정승의 유적지 반구정>

▼ 소명재(昭明齋)
유구(悠久)한 역사(歷史)가 흐르고 시대(時代)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유유(悠悠)이 흐르는 임진강변 (臨津江邊) 기암절벽(寄巖絕壁) 위에 조선조(朝鮮朝) 명재상(名宰相) 이신 익성공방촌황희(翼成公厖村黃喜) 선생이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만년(晚年)을 즐긴 반구정(伴鷗亭)과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 그리고 선생(先生)의 현손(玄孫)이시며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 여러 관직을 역임(歷任)하신 소양공월헌황맹헌(昭襄公月軒黃孟獻) 선생의 부조묘(不桃廟)가 안치(安置)되어 있는 이곳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일대에는 많은 후손(後孫)들이 거주(居住)하며 조상(祖上) 님들의 숭고(崇高) 한 유덕(遺德)을 이어받아 선조(先祖)의 향사(享祀)와 유적(遺跡)을 보존(保存)하고 종원들의 친목(親睦)과 단결(團結)로서 장수황씨사목종중운영위원회(長水黃氏沙驚宗中運營委員會)가 더욱 발전될 수 있도록 각종 회의(會議)와 행사(行事)를 위한 재실(齋室)을 종중운영기금(宗中運營基金)으로 2012년 3월 14일 착공(着工), 소명재 (昭明齋)라 칭(稱)하고 2012년 7월 27일 현판식 (懸板式)을 거행하였다.


▼ 방촌 황희 기념관



▼ 황희와 세종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신하를 불러들이다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양녕대군(세종의 형)의 세자 폐위에 반대하다 유배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황희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태종이 다시 불러 세종에게 천거했다. 그때가 세종 4년(세종 26세, 황희 60세)이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신하를 유배지에서 불러 과전을 돌려주며 관리로 다시 등용한 것은 세종의 대단한 인사 정책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 또한 원칙과 소신이 있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황희의 사람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며 늘 곁에 두려 했다.
세종은 분명하고 강력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부분을 주로 황희에게 맡겼다. 황희로 하여금 변방의 안정을 위해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는데 관여토록 했고,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희는 24년간 내각에 있으면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황희가 탄핵을 받을 때마다 혹은 고령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을 청할 때마다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1449년 (세종 31), 무려 87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을 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도 도움을 주었다.
황희는 사후(死後) '익성공' 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세종에게 제향을 올릴 때 같이 제향을 올리는,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학덕이 높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공무 처리의 귀재로 불린 사람이었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인정 많고 사람 좋은 선비였다.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으로 있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렴함에 대한 일화가 황희 정승이라는 애칭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황희선생 黄喜先生 영당 影堂
경기도 기념물 제29호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을 사목리
이 곳은 조선초기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대표적인 황희 (1363-1452) 선생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방촌영당, 경모재, 반구정, 앙지대가 있다. 황희 선생은 조선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였고, 세종대에는 영의정이 되어 세종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기었다.
이 영당은 6·25사변으로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인 초익공양식의 맞배지붕에 단청이 되어 있고 솟을삼문이 있다.













▼ 반구정
반구정(伴鷗亭)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조선 초기의 명재상 방촌 황희(黃喜, 1363~1452) 선생이 1449년(세종 31년)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직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입니다 . 임진강 기슭의 절벽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불렸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나, 이후 후손들에 의해 복구되었고,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되었으며, 1975년에 단청과 축대를 보수하였습니다. 1998년에는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재건하였습니다 .
현재 반구정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합니다. 맑은 날에는 정자에서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조망할 수 있어,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손꼽힙니다 .






▼ 황희 동상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 미얀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
이 위령탑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당시 버마)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수행 중이던 대한민국 외교 사절이 북한의 테러로 순국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당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열일곱 분의 외교사절과 수행원들이 희생 됐습니다. 파주시는 고귀한 희생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국안보의 성지(聖地)인 이곳 임진각에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慘狀)을 기록해 놓습니다.
탑높이 17m와 계단 17개는 열일곱분을 상징합니다.















▼ 망배단
조국이 애국선열의 독립투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그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민족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에 의하여 38선이 그어져 수천년간 통일국가였던 이 나라가 남북 분단의 비운을 맞게 되었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공산집단의 박해와 잔학한 만행을 피하여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산천을 떠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5백만 실향민들은 매년 추석절이면 임진각에 임시제단을 설치하고 북녘에 두고 온 부모와 조상에 대한 경모행사를 거행해 오면서 상설제단 설치를 염원해 오던 중 정부에서 총공사비 5억여 원을 들여(주관: 내무부·이북5도, 집행 : 파주군청) 1985년 9월 26일 북녘땅이 한눈에 보이는 임진각에 건립하게 된 상설제단으로서, 규모와 형태는 120평의 대지에 제단과 향로가 있고 중앙의 망배탑은 조국통일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재이북부조에 대한 명복을 비는 기원의 뜻을 담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7개의 화강석 병풍은 이북5도 및 미수복지 경기 강원의 고적과 풍물, 산천 등의 특징을 조각하여 실향민들의 망향의 상념을 달래고자 하였음.


▼ 망향의 노래비
잃어버린 삼십년
작사 설순남
작곡 박현진
노래 설운도
1. 비가 오나 눈이 오니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2.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년 세월 고양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 통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



▼ 자유의 다리
경기도 기념물 제162호 / Gyeonggi-do Provincial Monument No. 162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뒷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하였기 때문에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원래 경의선(京義線) 철교는 상·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임시다리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길이 83m 폭 4.5m 높이 8m 내외이다. 다리는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특히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탈선된 후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남북분단의 상징물이다. 2004년 아픈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 된 후 포스코의 지원으로 녹슨 때를 벗겨 내고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기도 (경기관광공사)의 적극적 의지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당시(1950년 12 월 31일) 이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한준기, 1927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하여 장단역에 도착했을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기관차에 있는 1,020여 개 의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 임진각 독개다리(Chat GPT 검색)
위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안쪽, 철책을 따라가다 보면 나옵니다.
역사: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 및 병력 수송을 위해 설치된 철교.
지금은 끊긴 상태로, 다리 중간까지만 접근이 가능합니다.
현재: 다리 위로는 철로가 놓여 있으며, 접근은 제한되지만 일부 구간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느낌: 낡고 녹슨 철교의 모습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실감하게 하며, 사진 촬영이나 역사적 성찰의 장소로 많이 찾습니다.

▼ 평화의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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