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시 50분경, 김삿갓면사무소 앞 정자에서 준비해 간 주먹밥을 먹고 외씨버선길 12길에 이어서 13길(관풍헌 가는 길)을 연속해서 걸었습니다.
외씨버선길 13길은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출발하여 초반에는 대야산성과 고씨동굴등산로 등 3곳의 높은 곳을 올라야 했고, 후반에는 팔괴2리와 팔괴 1리 사이의 높은 구릉지대와 영월교도소 표지석이 서 있는 각고개를 넘어야 하는 등 거리도 길고 높낮이도 제법 있는 24.6Km의 난이도 최상구간입니다.
이미 12.7Km의 12길을 완주한 후, 13길의 16.7Km 지점인 팔괴 2리 카누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피로가 몰려왔지만 오늘 완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걸어서 계획보다 늦은 오후 6시 30분경 무사히 최종목적지 관풍헌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난 3월 16일부터 부산에서 홀로 짬짬이 외씨버선길을 오가며 걷기 시작한 청송, 영양, 봉화, 영월 4개군을 잇는 246km의 외씨버선길을 오늘 모두 완주하였습니다.
외씨버선을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옛길과 삶의 고달픔이 깃든 옛 보부상길ㆍ화전민길도 경험할 수 있었고, 한가롭고 편안한 숲길뿐 아니라 험산준령의 백두대간 선달산과 박달령 등도 넘었고, 김삿갓과 단종의 애끊는 사연이 있는 길도 걸었습니다.
외진 산길에서는 잔뜩 긴장하며 걷기도 하였지만 적재적소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 표지판 덕분에 길 잃을 염려는 없었고, 지치고 갈증 날 때 나타나는 양심장독대(외씨버선길 최고 자랑거리)에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주 올레길, 한라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부산 갈맷길, 해파랑길, 남파랑길 등을 완주하였고, 지금은 서해랑길을 70% 정도 걷고 있지만, 외씨버선길이 우리나라 장거리 도보 여행길 중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외씨버선길이 계속 잘 관리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품 길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외씨버선길 13길(관풍헌 가는 길) 개념도>
<외씨버선길 13길(관풍헌 가는 길) 기록>
▼ 11:00시,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외씨버선길 13길(관풍헌 가는 길) 걷기 시작
▼ 13길 관풍헌가는길 안내판 내용
[약 8~10시간] 구간난이도, 최상
• 시점 김삿갓면사무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장터길 36
• 종점 관풍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
4백년 시간을 두고 김삿갓과 단종을 만난다. 김삿갓은 무슨 이유로 단종의 관풍헌을 찾아갔을까, 만났을까, 만만찮은 길을 걸으면 옛사람의 억척같은 삶을 그려볼 수 있다
1. 대야산성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신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해 온달산성과 정양산성 사이에 축조되었다. 김삿갓면 대야리 큰재 정상에 있으며, 둘러 400m, 높이는 4.5~5m 정도로 현재는 붕괴하여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2. 동지모둑
깊은 산중인 이곳 동지모둑에 화전민들이 벼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한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고 집터 주위에는 아직도 샘터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과 계곡을 근거지로 생활도 하고 돌담을 쌓아 계단식 다랑논을 만들어 쌀농사를 지었다 한다. 1970년대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모두 이주하였다.
3. 관풍헌
1392년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했던 건물이다. 1457년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이 거처를 옮겨 사용하였던 건물로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며 인근의 자규루에 올라 자규사와 자규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영월군 관광안내도
영월 10경 : 장릉, 어라연, 별마로천문대, 청렴포, 선돌, 한반도 지형, 법흥사, 고씨굴, 김삿갓유적지, 요선암/요선정
▼ 옥동 버스정류장
▼ 김삿갓 아리랑 장터
▼ 운탄고도 2길과 중첩되네요...
▼ 영월동로를 따라서...
▼ 반딧불 체험장 칠금이 표지석
▼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영월동로 교각
▼ 대야산성 쪽으로 올라갑니다...
▼ 꾸준히 올라갑니다...
▼ 운탄고도 표지판과...
▼ 외씨버선길 표지판도 보입니다...
▼ 이 표지판 글자는 거의 다 지워졌네요...
▼ 운탄고도 리본
▼ 내리막 구간을 지나서...
▼ 염소 사육장에 도착
▼ 남한강이 휘돌아가고 그 뒤로 산이 병풍처럼 보입니다.
▼ 영월동로에 잠깐 합류했다가...
▼ 대야마을 쪽으로...
▼ 멋진한옥을 짓는 주인장과 담소도 나누고...
▼ 대야리 경로당
▼ 가재골 쪽으로...
▼ 대야리를 뒤돌아보고...
▼ 그놈 많이 짖네요...
▼ 숲속으로...
▼ 숲에 들어가기 전에 아래를 조망하고...
▼ 꾸준히 올라갑니다...
▼ 가장 높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 더 올라갑니다...
▼ 이제 가장 높은 큰재에 올랐습니다...
▼ 대야산성(大野山成)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대야리 큰재(400.8m) 정상에 있다. 둘레는 약 400m, 높이는 4.5~5m 정도로 현재는 붕괴되어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삼국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의한 성으로 온달성 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되었다. 대야산성에서 바라보면 남한강과 어우러진 마을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 가재골 쪽으로...
▼ 가재골의 양심장독대를 지나서...
▼ 13길, 관풍헌 가는 길 안내판
▼ 가재골 완주인증 사진촬영 지점
▼ 대야산성(大野山城)
ㅇ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대야리 산 87 임 일대
ㅇ시 대: 삼국시대
ㅇ유적분류: 1) 문화유산> 유형문화재 > 유적> 정치국방유적) 성곽> 산성: 산성
대야리 가재골 마을의 민박집에서 북동쪽의 산길을 따라 약 30여분 올라가면 해발 400.8m의 큰재(성재) 정상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남서쪽의 온달산성, 북서쪽의 사적 제446호 정양산성(왕검성)의 중간에 위치한다. 대야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부정타원형이다. 둘레는 약 400여 m 정도이며 전체를 석축으로 돌렸으나 현재는 붕괴되어 남쪽성벽 일부와 서쪽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7-8m 너비의 내환도가 성벽을 따라 전체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5m 정도로 내외 협축으로 잔존성벽은 폭 3.3~3.4m로 내탁된 모습도 보인다. 성체는 석회암이나 점판암재질로 판상석으로 수평 눈 줄은 맞추고 있다. 성내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강돌이 성벽을 따라 곳곳에 흩어져 있다. 출토유물은 회백색연질의 기와 편과 적갈색연질과 회청색 경질의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
▼ 가재골길을 따라서...
▼ 계곡을 바라보며...
▼ 남한강이 보이는 쉼터에 도착
▼ 남한강을 바라보고...
▼ 계속 내려갑니다...
▼ 가재골교를 건너서...
▼ 각동리 쪽으로...
▼ 한강 안내판
▼ 강변로를 가로질러 다시 숲 속으로...
▼ 길론골 쪽으로...
▼ 편한 길을 걷습니다...
▼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내려다보고...
▼ 걷기 좋은 숲길을 지나갑니다...
▼ 이제 시멘트 길이 나오네요...
▼ 개망초가 활짝 피었네요...
▼ 이제는 시멘트길을 끝없이 오릅니다...
▼ 길론마을을 지나며...
▼ 뒤돌아보고...
▼ 고양이 두 마리가 신기한 듯 바라보네요...
▼ 계속 오르막은 이어지고...
▼ 시멘트길 끝지점을 지나서 또 오릅니다...
▼ 사모개에 도착... 잠깐 쉬었다가...
▼ 다시 오르막 고개를 넘어갑니다...
▼ 오늘 가장 힘들었던 구간입니다...
▼ 산신바위(괴목(槐木))
샘골과 새터 사이에 있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 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龜岩)가 있어 '구암'이라고도 했다.
옛 길은 길론을 거쳐 사모개, 동지모둑, 팔괴로 연결된다. 계곡에 장엄히 내려앉은 이 바위는 길을 걸어가는 옛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돌을 던져서 바위 위에 돌이 올라앉으면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하여 산신바위라 한다
▼ 이 바위가 산신바위인 듯?
▼ 골이 꽤 깊습니다...
▼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
▼ 오늘 가장 높은 곳인 고씨동굴 등산로에 도착
▼고씨동굴등산로 완주인증 사진촬영지점
▼ 태화산 경관 숲 (숲해설 안내도)
외씨버선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정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 4개 군이 모여 만든 4색(色) 매력이 가득 담긴 길입니다. 이어진 길의 모양이 조지훈의 '승무'에 등장하는 외씨버선과 닮았다 해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영월을 지나는 외씨버선길은 11,12,13구간입니다. 그중 13구간은 김삿갓면 사무소에서 출발하여 대야산성을 거쳐 태화산 등산로길과 고씨굴을 지납니다.
길을 걷는 동안 마주치게 될 생명력 넘치는 식생과 동지모독 (화전민이 살던 마을) 그리고 거친 산간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끝에 지어진 다랭이논은 이곳 사람들의 힘든 삶을 묵묵히 증거 합니다. 걸음이 끝날 즈음이 되면 여러분은 외씨버선길 13길을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행복으로의 여로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 팔괴리 카누마을 쪽으로 하산...
▼ 기분 좋게 내리막을 빠른 속도로 걷습니다...
▼ 동지모둑(각동리 돌널무덤(石棺墓))
괴목 서남쪽의 용구미소 위쪽에 있었다. 이곳은 태화산 줄기가 가로막혀 겨울에도 북풍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남한강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므로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분지인 영월 지방에서 유일하게 감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장이다.
돌널무덤은 일제 시대에 원용성(元容成) 씨의 구룽진 밭에서 발굴되었는데, 무덤은 두께 7~10cm 되는 자연석으로 쌓였으며, 너비 130cm, 길이 175cm의 덮개돌로 덮여 있었다. 이 덮개석은 마을 공동 우물의 다리로 이용되었으나 새마을 운동 때 덮개석 자체를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출토된 유물은 간돌칼 1점과 간돌화살촉 8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계속 이어지는 걷기 좋은 하산길...
▼ 돌담도 간혹 보입니다...
▼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 남한강이 보이네요
▼ 하산 완료
▼ 이곳은 운탄고도 1길이군요...
▼ 영월동로의 정양교 아래 통과
▼ 차량차단기를 지나서...
운탄고고 1330, 1길 우회로 안내판
▼ 이제는 강변 숲 속 길을 걷습니다...
▼ 하늘과 구름이 멋집니다...
▼ 남한강과 계족산을 바라보고...
▼ 남한강을 뒤돌아보며...
▼ 팔괴리 카누마을에 도착
▼ 각고개 쪽으로...
▼ 소망교회
▼ 외씨버선길 지킴이의 집, 호미농원
▼ 각고개를 오르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 다시 숲 속으로...
▼ 양심장독대가 반기네요
▼ 이제는 남한강변을 걷습니다...
▼ 천연가스 발전소인 듯?
▼ 도시가스 영월 정압기지
▼ 각고개 쪽으로...
▼ 봉래산 별마로천문대가 보입니다...
▼ 영월동로 아래 팔괴로를 지나서...
▼ 충신엄홍도묘
▼ 내 고장 역사 인물 엄흥도(嚴興道)
영월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 (首陽大君)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 관풍헌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숙부인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속에서도 엄흥도는 "為善被禍吾所甘心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이라는 말을 남긴 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 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장릉)에 모시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충신 엄흥도의 충의 정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숙종 11년(1695)에 육신사에 배향되었으며, 영조(1758)에 공조참판을 추증하고, 정조의 어명으로 장릉에 있는 배식단사 (配食壇祠)에 사육신과 함께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 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寧越府使尹陽來撰并書碑文飜譯碑
(영월부사 윤양래 전병서 비문 번역비)
朝鮮朝忠臣 藤興道 墓碣銘(조선조 충신 엄흥도 묘갈명) 옛날 조선조(朝鮮朝)의 六代 임금인 단종(端宗)께서 숙부(叔父)인 세조(世祖)의 강압에 못 견디어 급기야는 보위(寶位)를 내놓으시고 강원도 영월 (江原道寧越) 땅으로 귀양살이를 오시게 되니 아! 정축년(丁표年/단종이 승하한 해)의 일을 회고하면 오직 목이 메일뿐이다. 그러나 임흥도(巖興道)가 있어서 피를 토하며 통곡해 마지않았도다 단종(端宗)이 승하 (昇遐)함에 공(公)은 마음을 굳게 먹고 관을 준비하여 양지바른 산 언덕에 수장(壽/장사: 葬事)하려 할 때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연 (空然) 히 망령되어 나서지 말라 당장 나라에서 앙화(殃禍)가 내릴 것이라고 만류하는데도 공(公)은 혼연 (欣然)이 나는 "의(義) 로운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바 아니다" 누대(累代)의 신(名臣)들과 귀족들은 모두 안일(安逸)에 젖어 일신의 평안에만 급급 하는데 엄흥도는 하급직(下級職)의 미미(微微)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의(義) 로움은 당세(世)에 가장 뛰어났도다 그 후 二百年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경악 (: 놀라는 것)하여 마지않았도다. 우암(光華) 송시열(宋時烈翁)이 나라에 고(告) 하니 칭송 (稱頌)하는 소리가 빨리 퍼져 나갔고 강원감사 홍만동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사육신(死六)과 더불어 제향(준)을 누리게 되니 경건(敬茂) 히 머리 숙여 생각하는 바, 숙종(肅宗)께서 폐허(廢墟)된 사(開祠)를 보수(補修)하게 하시고 장능(莊陵)의 위(位)를 회복되므로 사람들은 물론 신(神)까지도 기꺼워하였더라. 숙종(肅宗)께서 흥도(興道)의 사적(事蹟)은 실로 높고 높으며 해와 달 같이 조명(照明)하고 태산같이 높으니 이에 작록(爵祿)은 없으나 빛나는 용포(龍袍)를 포상(賞)함에 우리의 후(后)가 밝았으니 대저 그대는 영월(卓越) 사람으로 임의(林義)의 자손이니 오랜 세월 그 게서는 족보(譜)에서 빠졌지만 그 후손들은 오히려 가(可) 히 견디어 오도다. 충의공(忠毅公)의 子 호현(好賢)이 화(和)를 낳아 근근이 이어오는 것 같더니 희림(希龄)과 한례(漢禮)가 증손(曾孫)과 현손 (玄孫)으로 점점 떨어져 나갔으며 오 세손(五世孫) 음원(應垣)과 응평(應平) 그리고 응일(應一)에 미치니 음원(應垣)과 음평(應)이 비록 죽어 후손(後孫)이 없으나(당시 삼족을 멸함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됨) 多幸히 성(姓)은 같으나 파 다른 승진 (永幹)에게 마침 和에 딸이 있어 아내로 주었고 외손(外孫)인 세(悌)와 한(漢)이 이미 없으나 그 後에도 계속(繼續) 대신 양화(香火: 세례)를 받들어 오히려 걸레(缺)하는 일이 없었다 발개 (八溪:穿越邑所在)에 있는 삶의 요소(墓所)는 유좌형(西里穴)인데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으나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묘소 관리가 안된 탓) 지금은 잘 손질되어 완연(宛然) 히 면목(目)을 일신(新)하게 되었다. 슬프다! 그대여 그대의 행적(行蹟)이 알길 없어 유감(遺憾) 없이 기술(記述)치 못함이 한이 되는구나 그 의 (忠義)를 생각컨대 여(餘他)의 일들도 可히 헤아리고 남음이 있도다 태화산(太華山)이 무너지고 금수(錦水: 영월東江)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길이 後世에 남아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멸(減)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때 내가 그대의 의기(氣)와 정의(節義)를 모아서 묘비(墓碑)에 적어 높이 들어 世上에 보이노니 마음과 뜻이 있는 자는 이를 짓밟고 없애지 말지어다
숭정(崇禎) 九十九年丙午(영조(英祖二年一七二六年)十月 日立 가의대부행(嘉義大央行) 영월부사 윤양(穿越府使 尹陽來)은 아울러 씀
영월부사 윤양래(寧越府使尹陽來) 전병서비석 西紀 2003年11月 16日 277年만에 발급(發掘)
原 碑石 保管場所: 화장문(花庄門) 경북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화장리 花庄里)
▼ 崇祖事業 東芝 嚴泰又記績碑
始祖公奈城君 33世孫忠毅公(應垣門花庄) 22世孫
예로부터 영월을 충절의 고장이라 함은 조선조 6대 임금이신 단종 충신 휘 엄흥도(諱嚴與道) 충의공(忠毅公) 할아버지의 만고에 빛나는 충의로운 행적 때문이다. 조상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이 자긍심을 갖고 그 행적을 배우고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숭조위선 사업의 참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성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엔 막대한 자금 소요가 수반되는 사업인지라 마음은 있어도 실행하여 이룩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남다른 숭조애종 정신으로 영월 엄문 특히 충의공계 (忠毅公系) 종중의 오랜 숙원 사업들을 본인의 정성과 노력으로 솔선하여 추진하면서 매 추진 사업마다 공사비의 전액 혹은 대부분을 본인의 사재로 출연하여 성공적으로 완수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태우(泰又) 종친이다. 공(公)의 호는 동지(東芝)요 시조공 38세 충의공 22 세손으로 1938년 음 2월 1일 경북 문경 내화(화장)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대처에 나가 면학 수업하고 일본국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본 (주)도시바 협력 회사인 아시안 트레이딩(주)를 설립하여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영월엄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그간 삶이 이룩한 숭조사업들을 기술하자면 먼저 2000년 5월 영월엄씨 시조공 내성군(奈
城君)의 표준영정을 제작하고 동년 10월에 영월 충의공 기념관내 '충절의상, 동상 건립과 2001년 10월 기념관내에 헌성비를 건립하였으며, 2004년 2월에는 이곳 팔계리 충의공 묘소를 지금 모습으로 성역화하는 큰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2007년 4월부터 문경 산북 내화리(화장)에 충의공 영정 봉안과 함께 충의공 묘소 성역화 공사 중에 발굴된 조선조 영조 때 당시 영월부사 윤양래공의 전병서 원(原) 비석 보존을 위하여 부지를 매입하고 충의각(忠毅閣)을 건립하여 당해 9월 1일에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한 바 있고, 충의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同年6월에는 윤양래 부사의 전병서 번역비 충의공 엄흥도 묘소 입구 이정표까지 제작하여 이곳 충의공 묘소 앞에 건립하였다. 이렇듯 후손이 선(善) 한 일을 쌓으니 복록이 두텁고 우리 영월 업문의 근원 또한 깊으니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다 뿌리 이미 깊이 내렸으니 그 가지와 잎들은 더욱 무성해질 것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종친 간에 우애함이 돈독한 것도 생전에 떳떳하고 사후에도 자랑스런 충신 현조 충의공의 음덕이 길이길이 후손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태우 종친이 솔선하여 수행한 많은 숭조위선 사업이 종친들의 귀감이 되고 후손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기에 그 의행을 영원히 전하고자 종중이 합심하여 돌에 새겨 기적(記績) 하니 초부 (樵夫)라 할지라도 이를 훼손하지 말라.
2008년 3월 8일 (음 2월 1일)
충의공 24세손 회일 짓고 영월 엄씨 충의공제 종친회원 일동 세우다
▼ 남영월교차로
▼ 팔괴 1리 마을회관
▼ 팔괴로 고갯마루를 넘어갑니다...
▼ 영월교도소 삼거리 통과
▼ 팔괴로 내리막을 내려오며...
▼ 팔괴교를 건너며...
▼ 제방안길 영월실내체육관 통과
▼ 맑은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고...
▼ 외씨버선길 안내판
관풍헌 가는 길,
김삿갓면사무소~길론~팔괴2리마을~관풍헌, 총 거리 23.6km 소요시간 8~9시간
4백 년의 시간을 두고 김삿갓과 단종을 만난다.
김삿갓은 무슨 이유로 단종의 관풍헌을 찾아갔을까. 만났을까.
만만찮은 길을 걸으며 옛사람의 억척같은 삶을 그려볼 수 있다.
대야산성의 멋진 조망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의 멋진 물줄기를 이룬다. 고씨동굴은 억만년인데 화전민의 삶은 이제 이야기로 전한다. 영월의 진짜 이야기가 골골이 박혀있는 길.
▼ 외씨버선 갤러리를 지나서...
▼ 관풍헌에 도착
▼ 영월부 관아(寧越府官衙) 사적
관아는 조선 시대 관청으로 수령이 정무를 보는 동헌과 생활하는 내아,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부속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동헌 가까이에는 객사를 두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절을 하던 망걸레를 지냈으며, 사신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영월부 관아는 동헌 영역은 모두 사라지고, 객사 영역의 건물과 자규루만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의 모습은 정조 15년 1791년에 그려진 '월중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월중도는 명월에 남은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질의가 깃든 장소를 8폭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벼슬이나 지위가 낮아짐)된 채 17년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한다. 세조 3년 1457년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을 담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5년 1396년에 세웠다고 전하며, 정조 15년 1791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앞면 5칸, 서익헌은 앞면 4칸, 중앙 정청은 앞면 3칸이며, 자규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성된 누각이다. 2013년과 2015년에 발굴 조사를 하여 건물터, 박석 바닥 포장을 시설, 내삼문 바깥재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터를 비롯하여 객사 건물로부터 내삼문 터에 이르는 보도 시설과 월중도에 표현된 관풍헌으로부터 자규루로 연결된 보도 시설을 확인하였다. '월중도'에는 객사 바로 북쪽에 동헌 영역의 건물군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근현대 건물이 들어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관풍헌(觀風軒)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영월 객사 동헌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께서 노산군(龜山君)으로 강봉 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 하시어 머무르시다가 1457년 세조 3년 10월 24일 승하하셨다. 1997~1998년 드잡이 및 번와 등 전면보수를 하였다.
자규루(子規樓)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자규루는 원래 세종 10년 1428년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세운 누각으로 매죽루梅竹樓 라고 불렸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된 해 여름, 홍수가 염려되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다 하여 후인들이 자규루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 후 선조 36년 1605년 큰 홍수로 누각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 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과 영월 부사 이동욱이 논의하여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 오후 6시 30분, 관풍헌 앞에서 외씨버선길 13길의 걷기 여행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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