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둘레길/남해바래길(완보)

남해바래길 지선 02코스, 노량바래길 (2025.5.15일)

요다애비 2025. 5. 18. 19:32

오후 4시 40분경, 금산바래길을 완주한 뒤 노량바래길을 걷기 위해 노량공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후 오후 5시 25분경, 노량공원을 출발하여 충렬사, 거북선전시관, 노량선착장, 그리고 산성산 탐방로를 차례로 지나 다시 노량공원으로 돌아오는 약 3.2km의 노량바래길 구간을 완주하였습니다.

노량바래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장렬히 전사하신 노량해전의 역사적 현장을 배경으로 조성된 길로, 남해 바다의 절경과 함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코스입니다. 특히 노량에서는 탁 트인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산성산 탐방로에서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의 고요함과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노량바래길을 오후 6시 50분경에 무사히 완주하였으며, 이후 남해읍내로 이동하여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날은 두 개의 섬바래길과 두 개의 지선 바래길을 걸으며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과 깊은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 아래 지선 02코스 노량바래길 안내는 남해바래길 홈피에서 퍼옴

▶지선 02코스 노량바래길◀
▶총 거리 : 3.2km
▶걷는 시간 : 약 1시간 30분 내외(쉬는 시간 포함 )
▶걷기난이도 : ★★★☆☆(무난해요)
▶걷는 경로 (단위 km) : 노량선착장(설천면 노량로 178) ←0.3→ 거북선전시관 ←0.2→ 남해충렬사 ←0.9→ 노량공원 ←0.2→ 산성산탐방로 ←1.5→ 레인보우전망대 ←0.1→ 노량선착장 (설천면 노량로 178)
▶코스개요: 노량바래길은 노량 유람선선착장 앞을 출발해 이순신장군의 가묘가 있었던 충렬사 사당 앞을 지난다. 이후 노량마을길을 지나 남해대교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노량공원에 닿는다. 노량공원에서 다리 쉼을 잠시 한 후 길을 건너 산성산탐방로를 걸으면서 아름다운 편백숲길을 만난다. 레인보우 전망대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다.

 

 

<지선 02코스 노량바래길 기록>

 

 

 

 

▼ 오후 5시 25분경, 노량공원에서 노량바래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비 내리는 노량로를 따라서...

 

 

 

▼ 노량마을과 남해대교를 바라보고...

 

 

 

▼ 남해 충렬사 입구에 도착

♧ 남해 척화비 / 南海斥和碑 / Anti-appeasement Stele, Namhae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보전하였다. 그 뒤 1998년 8월 남해군과 남해 문화원에서 원래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끝나자 다시 원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남해 척화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맨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척화비와는 모습이 달라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긴 다음 그 왼쪽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작은 글자를 덧붙였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하였는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 있는 20여 기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삼도통제사 이태상 비 / 三道統制使李泰祥 碑
이태상의 본관은 덕수, 자는 대상으로 숙종 27년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대손이다.
이태상이 진주병마사로 재직 중인 영조 39년에 남해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 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팅강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렬사

 

 

 

남해 충렬사 / Chungnyeolsa Shrine, Namhae / 사적 제233호
충렬사는 충신과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의 유구(區)를 처음으로 안치한 것을 기려서 순국한 지 30년째 되던 인조 6년(1628)에 지역의 선비들이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 9년(1658)에 다시 지었으며,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 준 현액을 받았다.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가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 내삼문, 외삼문, 청해루 등이 있다.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초빈*했던 곳에 가묘**가 있다. 사당을 세운 이후에는 충렬사 옆의 호충암(國史)에서 화방사(花芳寺)의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

 

* 초빈: 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체를 방 안에 둘 수 없는 경우에 관을 바깥에 놓고 이엉 같은 것으로 덮어서 눈비를 가리는 것
**가요: 정식으로 묘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
***승장: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인 '승병'의 장수

 

 

 

 청해루

 

 

 

비가 엄청 많이 내립니다...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 (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남해 충렬사 내삼문 안에 있는 이 비는 통제사 정익의 유지를 받든 학사 민정중의 부탁으로 우암 송시열이 1661년 11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글로 지은 것을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1663년 현종이 통영 충렬사와 함께 남해 충렬사도 현종의 편액을 받아 사액사당으로서의 위상을 높이자 통제사인 박경지와 김시성이 묘비를 세웠다.
비각에 편액된 보천욕일(補天浴日)은 중국 고서인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여왜가 무너진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태양의 신 회화가 열 명의 아들을 목욕시켜 하늘을 밝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훈을 비유하고 있다.

 

 

 

 충렬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假墓)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승리로 끝날 무렵인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9일 아침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다. 장군의 주검은 관음포를 출발하여 이곳 충렬사에 잠시 초빈(草殯)되었다가 고금도(古今島)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이 가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을 충렬사 부근에 임시로 안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조성한 무덤이다.

 

 

 

충렬사의 고목...

 

 

 

충렬사 입구 광장

 

 

 

노량마을 삼거리

 

 

 

거북선 전시관

 

 

 

 남해대교

 

 

 

바다 건너 구름에 가린 연대봉

 

 

 

산성산 탐방로로 오릅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고...

 

 

 

남해대교 옆을 지나갑니다...

 

 

 

정자에 도착

 

 

 

노량해전
戰方急 慎勿言我死 /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노량해전 전장에서(1598.11.19), 이순신 -

노랑 해전은 1598년(선조 31) 11월 19일에 남해 노랑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은 일본 수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략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기며 사망하였다. 이에 모든 일본군들이 순조롭게 철수하고 있었으나, 순천 왜교성(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조, 명 연합군의 포위를 당하여 위기에 직면하였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남해와 사천의 일본군들은 대대적인 구원 함대를 편성하여 왜교성으로 진격하였다. 왜교성 앞바다를 차단하고 있던 조, 명연합함대는 일본군 구원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급히 노량 수로로 이동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 해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전은 19일 새벽 2시경부터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야 끝났다. 결과는 조, 명연합함대가 일본 함선 2백여 척을 격렬한 대승리였다. 연합함대의 선봉군으로서 조선수군의 적극적인 공격작전,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통솔과 함께 조명연합군의 화공전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양 현강 고득장 등 여러 명의 잠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용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아침 동틀 무렵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안위보다.. 전황을 걱정하는 위대한 장수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량 해전은 조 명 연합 작전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서, 임진왜란 동안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었다. 노량 해전의 종식과 더불어 7년 간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남해대교

 

 

 

 노량대교

 

 

 

남해각을 바라보고...

 

 

 

 노량마을

 

 

 

 노량대교

 

 

 

다시 계단은 이어지고...

 

 

 

거의 산성산 정상부까지 오르는 듯...

 

 

 

순한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비는 거의 그쳤고... 초록이 무성합니다.

 

 

 

노량공원 쪽으로...

 

 

 

 전망대

 

 

 

노량해전 안내판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에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다. 조·명연합군은 일본수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 함선 2백여 척을 격멸하며 대승리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은 죽음의 순간에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동안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해전으로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간의 전쟁도 마무리됐다.

 

 

 

 노량대교

 

 

 

노량공원으로...

 

 

 

편백 숲길... 어둠이 시작됩니다...

 

 

 

이제 노량공원 400m 남았네요

 

 

 

덕신마을인 듯?

 

 

 

노량삼거리가 보입니다.

 

 

 

이제 산성산 탐방로를 다 내려왔습니다...

 

 

 

노량삼거리

 

 

 

노량공원의 노량마을 표시석

 

 

 

오후 6시 50분경, 노량바래길 걷기를 마칩니다.

 

 

☞ 내일 다초바래길과 노도바래길을 걷고, 남해바래길탐방안내센터에 방문하기 가까운 남해읍내에 숙소를 정하고 첫째 날의 바쁜 여정을 마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