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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둘레길/서해랑길(완보)

서해랑길 78코스 [서산] 도성 3리 마을회관 ~ 대산버스터미널 (2024.7.24일)

by 요다애비 2024. 7. 26.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모내기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벼이삭이 피어나고 있네요. 
서해랑길 78코스는 백제시대 칠지도 제작지 도성마을을 출발하여 진충사와 환성 3리 마을회관과 염전저수지를 지나서 대산버스터미널까지 13.0Km를 걷는 구간입니다.
이 구간에는 방조제와 얕은 언덕과 벼가 무르익어가는 농촌이 반복되는 길을 주로 걷게 되며, 특히 세계 5대 청정갯벌인 태안과 서산 사이의 가로림만을 벗어나는 구간으로써 가로림만의 갯벌과 그 위를 붉게 물들인 칠면초를 볼 수 있었습니다. 
30도가 넘는 더위로 인해 사진 찍는 횟수도 줄였고, 빨리 끝내려는 욕심으로 걷는 속도도 올렸던 78코스였습니다.
대산버스터미널에서 78코스를 걷기를 마감하고, 이어서 서해랑길 79코스의 초반 6.5Km 지점인 화곡 1리 마을회관까지 더 걷고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 주요 지점, 코스개요, 관광포인트, 여행자 정보는 두루누비 홈피에서 퍼옴
 
<주요 지점>
도성 3리 마을회관~ 3.7Km ~ 진충사 ~ 4.6Km ~ 환성 3리 마을회관 ~ 2.0Km ~ 염전저수지 ~ 2.7Km ~ 대산버스터미널 : 길이 13.0km 

<코스개요>
- 농어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로 밭길과 저수지를 지나는 코스
 
<관광포인트>
- 곰을 닮았다는 섬으로 세계 5대 청정갯벌인 가로림 만에서 갯벌체험을 즐길 수 있는 '웅도'
- 폐교를 활용하여 숙박시설로 개관한 '한글도서관 서산글램핑'
 
<여행자 정보>
- 시점: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 도성 3리 마을회관
교통편) 서산공용버스터미널정류장에서 261번 버스 승차 '서골. 산성 2리'정류장 하차 도본 2.2km
- 종점: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대산버스터미널
- 그늘이 없는 해변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길로 햇빛이 강할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음
 
 
<서해랑길 78코스 기록>

 
 
 
▼ 도성 3리 마을회관 앞에서 서해랑길 78코스 출발
 

 
 
▼ 마을회관 앞 건물 벽면에 칠지도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네요
 

 
 
▼ 진충사 쪽으로...
 

 
 
▼ 도성 1길을 따라서...
 

 
 
▼ 바깥고잔 버스정류장
 

 
 
▼ 가로림만 해변에 도착
 

 
 
▼ 도둑적섬을 바라보고...
 

 
 
▼ 안고잔 버스정류장
 

 
 
▼ 가로림만의 칠면초를 바라보고...
 

 
 
▼ 도성1리 버스정류장
 

 
 
▼ 대요리 쪽으로...
 

 
 
▼ 방조제 아래길 진충사 길을 따라서...
 

 
 
▼ 칠면초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 해안가에서 내륙 쪽으로...
 

 
 
▼ 고압전신주와 태양광발전 패널과 망일산 위의 공군부대가 보입니다...
 

 
 
▼ 초록의 들판을 지나서...
 

 
 
▼ 진충사에 도착
 

 
 
▼ 정충신사당(진충사) (鄭忠信堂(區忠詞) Jeong Chung-sin Shrine(Jinchungsa)
    이 사당은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장군의 신위(肿位)와 염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금성 정씨(錦城 鄭氏)인 공은 고려말(高麗末) 명장 경렬공(最烈公) 지(地)의 9대 손으로 금천군(錦川君) 윤(倫)과 정경부인 영천 이씨(永川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1575년 12월 29일(선조 8년) 전라남도 광주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천문, 지리, 의술, 시문 등 다방면에 정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광주목사 권율(福慄) 밑에서 종군(從軍) 하던 공은 17세의 어린 나이로서 홀몸으로 장계(狀啓, 전황보고서)를 평안도 의주 (義州)에 계신 선조(宣祖) 임금께 전달하여 조정의 만주(滿洲) 망명(亡命)을 막았다. 공은 그 해(159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주첨사, 만포진첨사, 평안도병마좌우후, 안주목사 겸 방어사로서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국토방위에 전력하였고, 명(明), 청(淸), 일본국(日本國)을 방문하여 동북아시아 정세를 달관하는 등 군사 외교가로 활약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서울 안현 (鞍峴, 길마재) 전투에서 반란군을 토벌, 난을 평정하고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대수장군(大樹將軍)의 풍모를 보이시며 공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仁祖) 께서는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 훈호와 금남군(錦南君)을 봉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팔도부원수(八道副元帥)로 활약, 청군(清軍) 3만을 외교적으로 철수시켜 서북지방을 회복하였으며 1630년 명(明)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가 일으킨 난에는 주사원수(舟師元帥)로 참전하여 난을 수습하였다. 공은 평안도, 경상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 결백하게 조국과 겨레를 위해 충절을 바쳤다.
1636년 5월 4일 숙환이 악화되어 61세로 별세하니 임금이 크게 슬퍼하시며 어의(御衣)를 벗어 수의(壽衣)로 하사하고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숙종(肅宗) 11년(1685.8.11)에 충무(忠武) 시호(諡號)를 주어 공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이곳 마힐산(摩詰山)은 인조가 하사한 봉토(封土)로써 공이 생전에 정한 유택(幽宅)에 모셨다. 1966년 후손과 지방 유지들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70년 진충사를 건립하게 되었고 매년 4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 華山 金基豐 先生 功绩碑(화산 김기풍 선생 공적비)
한평생 지역사회 발전과 교육문화 창달에 철신하시고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온 참 교육자 회신 김기풍 선생에서는 호구충절로 국난극복에 몸 바치신 금남군 충무공 정출신 장군의 부조요 (不祧廟) 사당이 퇴락한 것을 보고 신축해 수도국 1966년도 박정희 대통령께 건의하여 1970년도 진출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화산 선생은 후손들이 장군의 애국충절 성신을 기리고 그 뜻을 본받을 수 있도록 장군의 업적 현창과 위법이 빛나게 사당을 건립하게 해 주신 그 은공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조그마한 돌에 새겨 이 비를 세운다.
 

 
 
▼ 금남 윤충무공 정충신 사적비
 

 
 
▼ 염소 사육사를 지나서...
 

 
 
▼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 환성 3리 마을회관 쪽으로...
 

 
 
▼ 소나무 군락지 옆을 지나갑니다...
 

 
 
▼ 수류화계 표지석
 

 
 
▼ 벼이삭이 피어나는 논길을 지나갑니다...
 

 
 
▼ 구름과 푸른 하늘이 멋있습니다...
 

 
 
▼ 가는 곳마다 망일산 봉우리가 달리 보입니다...
 

 
 
▼ 멀리 가로림만의 칠면초도 보이고요...
 

 
 
▼ 환성 3리 마을회관에 도착
 

 
 
▼ 환성 3길에서 가로림만을 바라보고...
 

 
 
▼ 푸른 하늘과 구름과 잠자리...
 

 
 
▼ 염전 저수지 쪽으로...
 

 
 
▼ 멀리 망일산이 보입니다...
 

 
 
▼ 옛 부성염전 건물을 지나서...
 

 
 
▼ 만조시 우회로 갈림길에 도착
 

 
 
▼ 가로림만으로 진입...
 

 
 
▼ 칠면초를 구경하며...
 

 
 
▼ 그네도 있네요...
 

 
 
▼ 갯벌의 나무 솟대
 

 
 
▼ 대영어촌계 안내판
 

 
 
▼ 가로림만을 떠나며 뒤돌아보고...
 

 
 
▼ 산비탈에 일행들이 걸어오고 있네요...
 

 
 
▼ 방조제를 지나며...
 

 
 
▼ 대산읍이 보입니다...
 

 
 
▼ 위험구간 안내판을 지나서...
 

 
 
▼ 대산읍내로...
 

 
 
▼ 대산공공하수처리시설
 

 
 
▼ 구진 1교를 지나서...
 

 
 
▼ 대산버스터미널에 도착
 

 
 
▼ 서해랑길 79코스 안내판에서 걷기 종료
 

 
 
☞  곧바로 서해랑길 79코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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